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0.26 사건 (문단 편집) === 권력을 노린 [[정변]]이다? === [[https://casenote.kr/%EB%8C%80%EB%B2%95%EC%9B%90/80%EB%8F%84306|대법원 1980. 5. 20. 선고 80도306 판결 [(가)내란목적살인,(나)내란수괴미수,(다)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라)증거은닉,(마)살인(변경된죄명)] [전원합의체판결집(형2),49] ]] [[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631&C_CC=BB|피의자신문조서(제1회) 김재규 진술서]] [[https://www.google.com/amp/s/mnews.joins.com/amparticle/1525095|김재규 등 피고인 8명에 대한 대통령시해사건 공소장 전문]] >"김재규의 범행동기는 계획적으로 보기엔 너무 엉터리고... 우발적으로 보기엔 치밀합니다.” >----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 - [[이학봉]][* 실제로 이 말은 당시 보안사의 수사관 백동림이 했지만 드라마 상에서는 이학봉의 의견으로 각색되었다.] 세간에는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위하여 정변을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이 상당히 강하다. 그러나 검찰 조사 당시 김재규가 진술한 증언을 바탕으로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위하여 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최고권력자가 되기 위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주장에 의하면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것은 김재규 본인이 소요사태 수습에 대한 무능함을 드러냈고 본인과 형제들의 부정부패를 박정희가 알고 있었기에 자리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불안했던 점과 자신이 차지철에게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지만 박정희가 차지철을 신뢰하고 감싸는 행태에서 분노를 느꼈던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처음에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으로 차지철만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지철을 죽이면 김재규 본인도 사형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결국 김재규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동시에 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후 김재규는 자신이 스스로 정권을 잡지 않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직접 정권을 잡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김재규는 대통령과 차지철을 살해하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잡으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와중에 부마항쟁 이후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매우 커지고 이런 소요가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등 5대 도시로 확산되면 경제가 침체되고 박정희 정권이 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때 거사를 실행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10.26 사건을 사전에 계획하여 실행했다는 것이다. 1979.10.27. 김재규 심문조서 및 10.28. 김재규 자필진술서(수사기록66-71쪽)에는 김재규가 쓴 범행 동기가 나타나 있다. >“본인은 76.12.4.부터 정보부장으로 근무해 왔다. 정국이 시끄럽고, 야당의 활동이 날로 적극화돼 가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본인의 수습방안이 실패를 반복하여 무능함이 노출됐다. 본인 및 형제 등의 이권개입과 비위가 노출되어 대통령으로부터 경고친서를 받아 놓고 있었다. 군 후배이자 연하의 차지철이 너무 오만방자하여 수차에 걸쳐 수모를 당했고, 대통령은 이런 차지철만 편애했다. 이런 사유로 79.4월 경부터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하고 군부의 지지를 받아 직접 집권하려고 결심했다. 그 후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곧 있을 대통령의 중요 인사 단행에 본인이 포함될 것이라는 데 대해 불안을 느꼈다. 10.19. 부산지역 소요사태를 관찰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컸다. 이런 소요가 서울 대구 등 5대 도시로 확산되면 경제가 침체되고 현정권이 끝장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에 거사를 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본인은 10.26. 만찬기회가 결행의 적기라고 생각하게 됐다. 실제로 당시 언론들은 개각과 당직개편 계획을 보도했다. 여당은 경화정국 타개를 위한 방안을 논의했으며 정부-여당의 개편을 통해 국민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10080020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0-08&officeId=00020&pageNo=1&printNo=17847&publishType=00020|정국수습 민심일신 위해 개각.여권 개편설]] 11월 17일 검찰관 중령 전창열과 검찰서기 4갑 서윤석이 참여한 검찰 피의자 신문조서에서는 김재규는 이러한 자백을 내놓았다 >문: 범행의 구체적인 계획은 언제부터 어떻게 세웠나요? > 답: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대통령 각하를 시해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도 각하께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 ‘가동’에서 만찬을 하시는 기회를 이용 시해하려고 마음을 먹고 이번 거사와 같이 3군 참모총장을 이용하려고 각하께서 도착하는 시간과 약30분 간격으로 본관집무실에서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고 불러놓았는데 당시에는 대통령 각하의 주변경호가 삼엄하다고 판단되어 거사에 성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각 총장들을 김학호 실장으로 하여금 대신 저녁 대접케 하였는 바 본인이 각하와 만찬을 끝내고 돌아오니 그때까지도 각 군 총장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본인이 연희동 소재 명불상 음식점에서 술을 대접하고 끝낸 일이 있습니다. > > 그 후로도 계속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최근 일련의 정치사태가 경화된 정국으로 발전하여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또한 10월19일 본인이 대통령 각하의 명에 따라 ‘부산지역의 소요사태’를 관찰하려고 다녀왔던 바, 소요사태의 성격이 일반인 숫자가 월등한 것으로 보아 이는 서민의 조세정책에 대한 저항 및 정부불신임에 기인한 민란이라고 판단되었고 이것은 조속한 시일 내에 진정되지 않을 것이고 5대도시(서울 대구 등)로 확산되어 현 정권이 국내적으로 한계점에 이른 것이라고 판단되었고 > > 국외적으로는 미국을 위시한 우방 국가들이 유신체제를 非민주적이라고 평가하므로 대외의존적인 한국경제가 여러 가지로 난관에 봉착할 것으로 판단, 지금이 거사의 적기로서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는 식당밖에도 경호차가 2대 정도 대기하고 경호관 숫자도 7~8명 정도여서 경비가 삼엄하였으나 최근에는 밖에 경호차도 대기치 않고 경호관도 4~5명 정도여서 경비가 허술하므로 더욱 용이하였고 궁정도 소재 위 식당은 전부 본인의 심복인 경비원들이 경계를 담당하는 중정자체 시설이므로 거사에 용이한 점 등을 감안, 범행 장소로 선택하였고 대통령과 차지철은 본인이 직접 시해하기로 하고 수행경호관들은 중앙정보부 비서실 직원인 본인의 심복으로 처치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대통령과 차지철을 본인이 직접 하지 않으면 실패할 염려가 있고(심정변화로) 또한 다른 직원들은 접근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문: 대통령 시해후의 범행구상 내용은 언제부터 어떻게 구상하였나요. > 답: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보안유지를 위하여 단독으로 구상하여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조시대 이래 2人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골똘히 구상했습니다. 그 내용은 대통령 각하를 시해한 후 우선 늘 참석하는 김계원 실장에게는 보안을 유지시키고 현장목격자로서 동조자로 확보하고 현장부근에 군 실력자를 유인 대기시켜 놓고 거사 직후 본인의 거사 목적과 의도를 설득 또는 협박하여 끌어들이고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계엄사령관을 조종하여 사태를 장악하고 계엄사령부를 서서히 군사혁명 위원회로 전화시키어 국민혁명으로 이끌려고 하였습니다. > >그리고 최단시일내에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기존정당을 해체시키고 집행기관인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은 본인이, 부위원장은 육군참모총장으로 하여 군인들로만 구성하고 이를 감독하기 위하여 혁명회의를 설치 구성함에 있어서는 본인이 의장이 되고 국무총리는 부의장으로 하고 혁명위원은 관구사령관급 이상의 육군주요지휘관, 함대사령관급 이상의 해군주요지휘관 작전사령관급 이상의 공군주요지휘관 도지사급 이상의 각료전원으로 하고 다시 在京지구에 재직하는 사람은 상임의원으로 지방에 재직하는 사람은 비상임 의원으로 구성하라고 하였습니다. > >또한 혁명회의는 입법과 행정을 관장하고 부설기구로서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그 산하에 설치하되 혁명검찰부는 군민합동으로 참신한 검사와 군검찰관으로 구성하고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관급으로 구성하여 유신헌법 기초에 참여한 자. 5·16혁명 주체로 권력 주변에서 치부한 자 및 악덕기업 및 특혜 재벌 등 비 동조 세력을 처단하고 재산을 국고에 환수한 후 본인의 거사목적과 의도를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여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헌법기초위원회를 설치하여 국민이 원하는 헌법만을 연구 작성케 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하므로서 확정시킨 후에 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 문: 육군참모총장과 중정 제2차장보를 사고현장 부근에 부른 이유는 > 답: 처음부터 거사 후에 이용할 목적으로 유인 하였는 바 거사 후에 곧바로 와서 육군총장을 곁에 두고 데리고 다니면서 딴 생각을 못하게 계속 접촉을 유지하면서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게 되므로 외부와의 접촉을 단절시키고 본인이 직접 사태의 진전을 확인하기 위하여 미리 불러놓는 것이고 김정섭은 대통령과의 만찬관계로 본인이 직접 육군총장을 대접할 수 없으므로 그 공간을 메꾸기 위하여 본인의 대리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국내사태를 해설해 주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 문: 만약에 상대방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 답: 거사 후에 설득을 하여 혁명의 동조세력으로 이끌고 말을 듣지 않으면 협박 또는 감금을 해서 본인의 의도한 바대로 쫓아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바짝 붙어 따라다니며 감시를 한 것이고 우선은 사실을 속인 것입니다. >---- > 문: 식당정원에서 김계원 실장과의 대화 중 차지철을 제거한다고 제의한데 대하여 김실장이 반대하였다면? > 답: 본인은 그냥 농담이오 하고 얼버무리고 또한 대통령 시해 현장에서 함께 죽여 버렸을 것입니다. > 문: 왜 대통령을 시해하였나요. > 답: 본인은 중앙정보부장직에 있으면서 현 유신체제와 이를 방호하기 위한 긴급조치의 맹점과 부작용에 관하여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철폐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순리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하여야 하는데 현 체제는 강한 체제이므로 권력의 핵인 대통령을 살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거행하였습니다. >---- > 문: 그렇다면 왜 차실장까지 살해하였나요. > 답: 본인이 거사를 하기 위하여는 장해자인 차지철과 수행경호관들과 함께 처리하여야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또한 항상 차지철이 강경한 발언과 월권적 행동으로 농간을 부리어 본인이 각하에게 드린 건의가 좌절로 돌아가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함께 제거하였습니다. >---- > 문: 그런 순수한 목적이라면 대통령만을 제거하고 현장에서 자살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지 않나요. > 답: 물론 본인의 목적을 문서로 남겨 놓고 위와 같은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본인이 살아남아야만 대통령 제거 이후의 혼란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뒷설거지를 하고 본인의 구상대로 통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문: 대통령 각하로부터 야단을 맞은 사실이 있나요. > 답: 근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사태 수습에 있어서 중앙정보부장의 직책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수습책을 건의하였지만 최근에 들어 자주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통령 각하로부터 질책을 당한 것은 사실이나 본인이 무능력하다고 각하께서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형제간의 이권개입 문제에 개입하였다고 하나 그것은 금년 4월경 각하의 개인 서신으로 “계씨인 김항규가 사업상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는데 주의하라는” 내용의 경고를 받은 바 있기는 합니다만 당시 중정 감찰실장인 김학호 소장으로 하여금 김항규의 비위사실 및 경위를 재조사하여 각하에게 보고 해명한 사실이 있으나 별것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또한 요직 개편설 문제는 사실 무근입니다. >---- > 문: 전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 답: 차지철이 본연의 업무인 경호업무 외에 월권을 하여 정치문제 등 광범한 업무에 관여하고 의견 및 주장에 있어서 본인과는 정반대로 강경일변도였으므로 못마땅하게 늘 생각한 것은 사실이고 차지철이 군 후배이고 연하자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게 또는 연장자에게 오만불손하고 방자한 행동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으나 본인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 문: 대통령 시해 후의 정국혼란을 수습하고 주도권을 장악할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였습니까? > 답: 기존의 정치인 중 여당권에서는 대통령감이라고 생각되었던 인사는 전부 부정부패에 관련되어 있어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었고 야당권에서는 김대중이는 사상적인 하자가 있어서 곤란하고 김영삼 의원은 일응 출마는 할 수 있지만. 그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고 이철승 의원은 당 자체에서 사꾸라시 하므로 국민의 지지기반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그러므로 대통령 시해 후의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적임자는 우선 본인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과도기적 단계를 일정기간 지나 사태를 수습한 후에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려고 한 바 대통령 출마후보자는 일응 최규하 국무총리나 태완선 유정회 의장 등을 꼽을 수 있고 본인도 상황에 따라서 출마여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습니다. >---- > 문: 이번 거사를 위한 동조세력 규합은 어떤 방식으로 하려고 하였나요. > 답: 별도의 조직을 활용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기존체제의 조직을 설득 내지는 협박을 통하여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중앙정보부 조직은 본인이 약 3년간 정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부하들이 본인의 의도를 잘 받들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무력은 없지만 전국적인 광범위한 조직이고 군 조직은 본인이 오랫동안 몸 바쳐 왔기 때문에 본인이 의도한 바의 혁명목적을 제일 먼저 동조할 것으로 생각하였고 평상시에도 본인은 군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주 접촉과 노력은 하였으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안문제가 있어서 의도를 노출시키거나 거사에 가담하라고 권유한 사실은 없습니다. >---- > 문: 대통령을 시해한 후 어떠한 방법으로 범행을 은폐하려고 하였나요. > 답: 궁정동 소재 중정식당은 중정자체의 시설임을 주장하여 비상 국무회의의 결의 하에 따라 그날 밤으로 본인이 평소부터 신임하던 안전국장 김근수 등 안전국요원으로 하여금 궁정동 현장에 보내어 궁정동 소재 보안을 유지시키고 사건현장은 안전국 요원이 조사 중이라는 구실로 일체 비밀로 하고 본인이 의도하는 혁명이 성공단계로 접어든다고 판단될 때 국민 앞에 진상을 발표하려고 하였습니다. >---- > 문: 이번 범행이 실패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 답: 결국은 보안이 유지되지 않고 가장 믿었던 김계원 실장이 너무 빨리 변심을 하였기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 목적이 채 관철될 시간여유가 없어 중도에서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김재규를 취조한 이학봉은 김재규와 잘 아는 사이였다. 왜냐하면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이었을 때 보안사에서 수사계장으로 브리핑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학봉은 부산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운전병한테서 박정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급히 사령부로 가니 수사관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김재규가 내일 새벽이면 새 세상이 와서 다 잡혀갈 놈들이 나를 조사한다고 큰소리치니까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에 이학봉은 사태를 일단 "혁명적 상황"으로 판단하고 어떤 부대가 서울로 쳐들어올지를 빨리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새벽 1시에 직접 조사실에서 김재규를 만났다. 김재규는 이학봉을 알아보면서 "자네가 수사책임자야?"라고 말하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학봉이 김재규한테 "사령관님 왜 그러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김재규가 "이미 판은 끝났어,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게 나라를 위한 거야"라고 대답했다. 이학봉은 속이 바삭바삭 탔다. 분명히 거사에 동원되는 부대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중앙정보부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전두환에게 보고해야 하는데 김재규가 자꾸만 동문서답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본 김재규는 이학봉에게 "그러지 말고 전두환 불러줘"라고 계속 부탁했지만. 이학봉은 "저도 뭔가 알아야 가서 말씀드리고 오시라고 할 게 아닙니까?"라고 대답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당시 김재규를 취조한 이학봉은 훗날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잔재주를 부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조금은 우둔한 편이라 말했으며, 말을 들어보니 거사 전에 워낙 여러 가지 공상에 빠지다 보니까 실행계획이 너무 빈약했던 것 같다고 평가하며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남겼다. >"김재규는 자기가 대통령을 하면 박정희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야당 탄압을 늦추고 민주주의를 하면 미국 대통령 카터와의 불화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였죠. 그리고 경제문제는 박정희 대통령같이 기업인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면 계속 문제없이 굴러간다는 사고였어요. > >그리고 이상한 건 김재규가 우리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이라 그런지 미신을 많이 믿는 것 같았어요. 남산의 하얏트 호텔 아래 유명한 풍수쟁이가 있었죠. 그 사람이 김재규의 아버지를 이장하면서 앞으로 그 집안에 왕이 나온다고 했어요. 김재규는 그걸 믿고 있었던 것 같았어요. 김재규는 거사가 있으면 미국이 동조할 거라고 계산한 것 같았어요. > >그게 오판이었죠. 제가 김재규에게 ‘어떻게 그렇게 치밀하지 못한 거사 준비를 했느냐’고 뭐라고 했죠. 그랬더니 하는 말이 ‘대통령을 죽이는 거사를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느냐’는 거예요. 현장에 있던 측근 몇 명에게 실행 순간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참모총장 정승화만 옆에 와 있게 해서 동조하는 모습으로만 보이게 하면 된다는 거였죠. 계엄령을 선포하고 비상기구를 만들고 대통령이 되려고 했다는 거예요. > >내가 김재규보고 ‘대통령을 죽이면 그 치명적인 도덕성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그랬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김재규가 그건 적당히 얼마든지 다르게 꾸며댈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아마도 은폐나 조작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거 같았어요." >----- > [[http://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8913|‘팩션’- 엄 변호사의 못다한 이야기 10·26과 김재규 그리고 어떤 진실 ③]] 그러던 중 김재규는 수사관들이 상황 파악을 위해 켜 놓은 라디오에서 새벽 4시 10분께 '[[정승화]] 계엄사령관 임명 소식을 듣고 돌연 손뼉을 치면서 떠들어댔다고 전두환 회고록에 적혀 있다.[[https://news.v.daum.net/v/20191025060201984|#]] [[허화평]]은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요청으로 범행 현장 인근에 있었고 사건 직후 육본으로 동행한 사실을 그때서야 수사관들이 알게 됐다고 한다. 이후 김재규는 계엄사령관 임명 사실을 전해 들은 뒤 안도한 듯 조사관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사실을 줄줄이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이학봉 당시 수사국장은 이를 전두환에게 즉각 보고했고 수사관들은 정승화와 김재규의 공모에 대한 심증을 굳히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3단계 혁명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 술술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이학봉의 증언에 의하면 11월 8일. 김재규는 구체적인 “3단계 혁명 계획”을 실토했다.[[https://m.chosun.com/news/article.amp.html?sname=news&contid=1996052770439|#]] 제1단계는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제2단계는 정승화로 하여금 군주도 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김재규의 이 3단계 혁명계획은 매우 정교하게 진술됐다. 중정에 남아 있을 요원들을 연행하여 남산에 수용시키고 사건 현장만 조사하게 했다. 이후 현장증거를 인멸시키고 중정 간부를 소집하여 자신의 범행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고 안전국장이 진상을 조사하고 있다고만 알리게 할 계획이었다. 또 [[정승화]] 육군총장을 설득 또는 협박하여 혁명위원회를 발족시켜 국민이 납득, 호응할 수 있게 홍보하고 ‘10.26 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전환했다. 또한 정부 조직을 최대로 활용, 참여의식을 갖게 했다. 혁명위원회 의장은 [[김재규]] 본인이 하며 부의장은 국무총리, 위원장은 정승화와 상의하여 총장 또는 국방장관으로 하고, 위원은 전 각료, 각군 총장, 군사령관, 군단장, 관구사령관, 해군함대사령관, 공군작전사령관, 각 도지사로 한다. 위원은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으로 한다. 혁명검찰부와 혁명대판소를 설치하고, 검찰부는 군민 합동으로 참신한 검사 및 검찰관으로 임명하며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성급으로 구성하고, 반혁명분자를 제거한다. 이후 빠른 시일 내에 김재규는 직접 대통령에 출마하여 집권하고자 했다. 김재규는 정보부장으로 근무하며 국내외 정보를 분석해 보니 우리나라에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없고, 나의 권한을 최대로 활용하면 대통령 시해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으며 중정의 조직력과 권한으로 군부의 세력을 장악할 수 있어, 스스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재규의 군맥은 대단했다. 정승화는 김재규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이 된 사람, 특전사라는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있던 정병주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을 할 때 대대장으로 시작해 줄곧 인연을 맺어 온 사람, 수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3사령관인 이건영은 김재규가 정보부장일 때 차장으로 데리고 있다가 다시 3군사령관으로 내보낸 심복이었다 심지어 김재규는 이들과 상당히 자주 만나며 친분을 쌓아왔기에 사실상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군맥이라면 자신이 쿠데타를 실행했을 때 동조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11월 8일, 이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구상해 왔다는 '3단계 혁명계획'을 실토했다. 제1단계는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해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제2단계는 정승화로 하여금 군 주도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525396|#]] 실제로 김재규의 계획은 거의 들어맞았는데 김계원은 만찬 직전에 [[김재규]]에게서 [[박정희]]와 [[차지철]]을 죽일 거란 말을 들었으나 그의 말에 암묵적으로 동조했고,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만찬에 참석했다.[* 훗날 김재규의 진술에 의하면 김계원이 자신의 말에 동조했기에 살려뒀다고 이야기했으며, 만약 동조하지 않았으면 물론 농담이요라고 말한 뒤 박정희, 차지철과 함께 죽여 버릴 것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재규가 한 "형님 그놈을 해치워 버릴까요? 뒷일을 책임져 주시오.”라는 엄청난 말에 김계원이 선뜻 동의한 것은 차지철만이 아니라 박정희까지도 해치우겠다는 의도에 동의한 것이고 김재규가 언젠가는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는 데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는 해석이라는 주장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게 무슨 말이오? 경호실장을 죽이겠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설명해 보시오!"'''라며 크게 놀랐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차지철을 해치워 버리겠다"는 말이 국가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말 그대로 암살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는 주장도 있다.[* 이 견해는 다름 아닌 10.26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http://www.law.go.kr/%ED%8C%90%EB%A1%80/(80%EB%8F%84306)|(대법원 1980. 5. 20., 선고, 80도306)]]에서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대법관 등이 제기한 소수의견에 나타나 있다. 양병호 당시 대법관의 소수의견을 그대로 인용한다. "(김재규의)"해치워 버린다"라는 말이 깡패사회도 아닌 피고인들과 같은 국가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죽여없앤다는 뜻의 말로는 도저히 새겨들어지지 아니한다 할 것이고 피고인(김계원)이 위 T(차지철)를 암살하겠다는 것인 정을 인식하였다고 인정할만한 자료는 보여지지 아니한다."] 또 김계원은 박정희 살해 당시 밖으로 나간 것은 자신도 김재규에게 살해될까봐 두려워서였다고 증언했으며 법정에서 박정희 살해 후 김재규가 보안을 유지해 달라는 말에 "알았소"라고 이야기한 것은 '그때 김재규가 총을 들고 살기가 등등하여 그 장소를 모면하기 위하여 '알았어'라고 한 것뿐이다'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자 김계원은 자신도 살해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김재규가 이 정도 일을 벌이려면 그에 맞는 지지세력이 있거나 치밀한 계획이 있다고 생각하여 김재규의 지시대로 박정희의 시신을 처리하고 사건현장 은폐에 동조하며 청와대를 통제했다. 한편 정승화가 10.26 사건 당시에 보여준 행동은 상당히 논란이 많다. 일단 10.26 사건 당시 피살 현장에서 매우 가까이[* 약 50m 정도] 있으면서도 김재규의 암살 시도를 눈치채지 못한 채 함께 차를 타고 육본으로 이동하였다. 또 당시 수경사령관이었던 '''전성각''' 육군 소장에게 명령을 내려 수경사 병력을 장악하고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게다가 김재규가 대통령 시해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점이 [[https://news.joins.com/article/1531368|정승화 전 육삼총장 공소장]]을 보면 함께 차를 타고 서울후암동소재 병무청 앞을 통과할 즈음에 김재규가 사탕같은 껌(네모난 계피 껌) 1개를 주어 이를 받아먹으려다가 그 속에 약물이 들어있어 김재규에게 이용당하지 않을까 의심하여 껌을 슬그머니 바닥에 버렸으며,[*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는 사탕 대신 껌을 준다.] 상황 수습을 위해 정승화가 전군에 비상발령을 하고, 계엄군의 서울 진주를 위해 육군 ○○부대의 출동을 지시한 뒤에 대통령 시해범인이 측근이라면 청와대 내부의 소행인지 또는 [[김재규]]의 소행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수경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부대에 이상 없느냐, 병력은 모두 장악하고 있느냐"라고 물어보자 '아무 이상없다'는 대답을 듣고 청와대 내부의 소행은 아니고 김재규의 범행임을 확신하게 됐다. 그러나 김재규는 현직 중앙부장으로서 막강한 조직과 권력이 있고 그 배후에 상당한 추종세력이 관련되었을 것이며, 대통령 시해 후 나라의 실권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이에 동조하는 것만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믿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육군본부에 도착한 이후에도 박정희가 저격에 의해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숨긴 채 노재현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부장관]]에게 박정희가 죽었으며 자세한 경위는 중앙정보부장에게 물어보라면서 사건 경위를 축소하여 보고하였고 차지철이 지휘했던 [[수도방위사령부|수경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려 시도하는 등 김재규의 정권장악시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나 김계원의 실토로 10.26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지시도[* 전두환은 정승화가 김재규를 체포하라 했을 때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말로 정승화와 김재규가 공범이라는 것에 확신을 얻었다고 주장하며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정승화를 사실상 김재규와 권력을 찬탈하려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정승화가 사실상 김재규와 한패였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승화는 자신의 재판과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자신은 김재규와 친한 지인이 아니라 1979년 2월 총장 취임 당시에 처음 식사를 했을 정도로 서먹서먹한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시해 사건 당시에 총소리를 듣긴 했으나 그 총소리가 먼 곳에서 난 총소리로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김재규가 피 묻은 셔츠를 입은 채로 자신에게 오고 나서야 그 총소리가 청와대에서 난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재규와 같이 차를 탄 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라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김재규는 "저도 정신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정승화는 김재규가 난장판이 된 만찬장에서 빠져나온 것뿐이라 판단하여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하며 박정희를 암살한 범인을 추론해 보니 청와대 같이 경호가 엄중한 곳에서 외부인이 대통령을 저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생각했고, 이에 청와대 경호를 맡고 있는 차지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즉, 정승화는 평소 차지철의 행보와[* 정승화는 차지철은 야심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차지철은 경호실 상황실에 육군 예하사단에까지 직통전화를 연결하여 지휘관들을 제멋대로 부릴 정도였으며 군에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권력이 날로 막강해지자 군 일부 장성들이 차지철에게 찾아가 아부를 했을 정도였기에 이 사건이 단지 차지철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배후에 군 지휘관들이 개입된 심각한 사태라고 판단했다.] 여러 정황을 보아 범인이 차지철이라고 오판하여 수경사 병력을 장악해 차지철을 제압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는 264일의 쿠데타 25페이지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또한 정승화 입장에서는 통치권자 유고상황에서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범인이 누구인가보다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과 계엄선포 문제 등 사후조치문제가 더욱 시급하고 중요했기에 범인 색출이 우선순위가 아니였다. 그리고 김계원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어 김재규를 체포하라고 했을 때 "안가에 정중히 모셔라"라는 말은 1997년 무죄 판결 당시 이 지시를 당시 김재규가 막강한 중앙정보부장이었기 때문에 조심해서 다루라는 뜻이었을 뿐 별다른 의미는 없었으며, 오히려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에게 조사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다는 말이었다고 한다.[[https://news.joins.com/article/2938463|#]] 게다가 정승화는 전두환이 아닌 김진기 헌병감에게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다. 그러나 김재규와 정승화는 사건 현장에서 같이 차를 타고 와서 육본의 상황을 진두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승화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둘이 마치 한 패인 것처럼 보였고, 다른 장관들이 이들의 눈치를 본 것은 사실로 보인다. 실제로 김계원이 김재규가 살해범이라는 것을 증언할 당시에 정승화는 "김 비서실장이 내가 김재규와 공모한 줄로 알고 눈치만 보고 있다가 그게 아닌 걸 알고서는 은밀히 내게 얘기한 것이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주변사람들 눈에는 김재규와 정승화가 마치 한패였던 것처럼 보였던 것.[[http://www.donga.com/news/List/Series_70000000000570/article/all/20130909/57538334/1|#]] 이러한 정황 때문에 수사를 맡은 이학봉 중령은 전두환에게 김계원, 정승화 두 사람을 구속하여 수사해야겠다고 건의할 정도였다. 수사보고를 받은 전두환은 김계원이 김재규의 범행에 동조한 것 같다고 판단했으며 정승화가 시해사건 현장 부근에 김재규의 초대로 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10.26 사건 직후 김재규가 단독범인지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전두환과 합수부 수사관들은 일단 정승화와 김계원을 공범으로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전두환은 이학봉에게 "김계원 실장은 구속수사해라, 그러나 정승화는 어제 계엄사령관이 됐다, 그러니까 함부로 할 수 없다. 지금부터 극비리에 내사를 더해봐라"라 지시했다. 훗날 전두환은 5·18 사건공판기록에서 이학봉 중령이 "육군총장이 대통령이 돌아갔다는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시신수습과 범인색출을 한 흔적이 없다, 청와대를 포위시켰는데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보고를 받고 정보부장과 대통령비서실장, 육군참모총장이 공모한 조직적인 내란이며 비록 계획은 실패했지만 정승화를 구속하면 배후세력에 의해서 또 다른 내란행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체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http://www.chogabje.com/premium/book/view.asp?sCidx=42|#]] 이러한 이유로 정승화는 10.26 사건 후 계엄사령관이라는 막강한 직책에 있으면서도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전두환에게 약점을 잡혔고 전두환의 월권행위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꾸로 당하고 말았다. 이후 전두환은 정승화가 김재규에게 이용 혹은 동조한 사실을 이용하여 정승화를 체포시키고 최규하를 하야시키는 쿠데타를 일으키며 권력을 잡았고 정승화를 사실상 김재규와 한패로 몰아 처벌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김재규와 한패가 아니였기에 [[하나회]]는 정승화와 김재규와의 연관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내란죄]]가 아니라 '''내란방조죄'''라는 이상한 혐의를 겨우 엮어 처벌했다.[* 물론 민주화 이후에는 무죄로 판결되었다.] 한편 [[대한민국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국무회의는 [[청와대]]에서 [[최규하]] 총리에 의해 열렸어야 하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김계원한테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최규하는 경호실에 명령을 내려 대통령 시해의 현장부터 확보하라는 지시부터 내렸어야 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김재규가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김재규의 의도대로 국무회의를 국방부에서 열었다. 한마디로 최규하는 김재규가 정권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김재규의 뜻에 동조하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이는 [[https://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nNewsNumb=20161222249&nidx=22250|김계원의 생전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신현확을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오기 전까지 최규하 총리를 비롯한 장관들 중 진상을 밝히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각이 완전히 무력화된 상황이었기에 김재규가 체포되기 직전까지 김재규가 상황을 주도했다. 김재규가 이끄는 중앙정보부, 김계원이 이끄는 청와대, 정승화가 이끄는 60만 육군이 단합했던 것처럼 보였던 당시의 상황은 누가봐도 막강했으며 실제로 김재규의 쿠데타는 거의 성공직전처럼 보였다. 그러나 계엄선포를 해야한다는 김재규의 주장에 국무위원들이 반발하면서 김계원이 김재규의 배후에 친위 세력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배신을 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만약 김계원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김재규가 주도하는 새로운 정부가 국가를 좌지우지 했을 것이다. 즉, 제2단계까지 성공적이었고 3단계까지 성공할 찰나에 김계원의 배신으로 정승화와 노재현이 진실을 알게 되어 김재규가 체포되고 박정희 살해를 순순히 인정함으로써 물거품이 됐다는 것이다. [[허화평]]은 2019년 10월 25일 인터뷰에서 "김재규는 합수부 조사 때는 (범행을) 자책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그를 민주 투사로 생각하는 변호인단이 구성돼 활동하면서 법정에서 수차례 진술(자필 진술서나 조사 과정의 발언)을 바꿨다"라고 말하며 그가 절대로 민주주의를 위한 거사를 행한 것이 아니라 주장했다. 그리고 당시 수사를 지휘했던 [[전두환]]은 김재규를 "처세에 능하고 관운이 좋아 권력의 그늘에서 18년간 온갖 특권을 누린 사람"으로 평가하면서 "김재규의 언동에서는 자신의 평생 은인인 박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나 충성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충격이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https://www.google.com/amp/s/m.yna.co.kr/amp/view/AKR201704031699000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